공포, 미스테리

카리브 해 섬나라 바베이도스의 움직이는 관

스눞히 2016. 9. 29.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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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 해 섬나라 바베이도스의 움직이는 관

 

1. 사건 개요

 

본 사건은 19세기 초, 카리브 해 섬나라인 바베이도스에서 일어났다고 전해지는 미스테리한 일이다.

 

분명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납골당 안에 있던 관들이 움직였다고 하는 사건이다.

바베이도스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 교구의 오이스틴스(Oistins)에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 교구 교회(Christ Church Parish Church) 묘지의 지하 납골당 'Chase Vault'에서 이 사건이 벌어졌다.

 

2. 체이스 가문의 가족 묘소

 

18세기 영국 귀족 토머스 체이스(Thomas Chase)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1798년에 서인도 제도의 섬나라 바베이도스로 이주하였다. 헌데 기록에 따르면 그는 노예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했고 가혹하게 부렸는데, 당시 남아있던 소수의 원주민에게도 동일하게 대해서 악명이 높았다.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그는 본국으로부터 영국에 돌아갈 수 없다는 통보를 받는다.

그는 고국에 가지 못한 채 1807년 4월 10일 바베이도스 도심의 크라이스트 처치 교구 교회에 체이스 가문 전용 납골당을 만들었다.

 

이 납골당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있는데, 월론드 가문이라는 다른 귀족 가문이 건설했었던 것이었다가 짓던 도중에 월론드 경이 영국으로 돌아가면서 월론드 경의 친구이자 지인인 체이스에게 넘겼다는 설도 있다. 납골당이라는 건물은 당시 평민들이 일반적으로 쓰던 매장 방법과는 다른 방식이었는데, 서양의 납골당은 관을 안치하는 용도로 지어진다.

 

 


보통 평민들은 관을 흙속에 직접 묻는 방식으로 장례를 치른다.

 

부유층이나 귀족은 '지하 납골당(Burial Vault)' 형태로 관이 들어갈 구덩이에 석벽이나 벽돌벽을 쌓아 석곽을 만들고 그 안에 관을 안치한 다음 돌뚜껑을 닫는 방식 또는 아예 지하에 방을 지어서 관을 여러 구 안치하는 방식을 취했다.  체이스 경 역시 관을 직접 땅에 묻지 않고 안치하는 이런 납골당 방식으로 가족묘를 건설했다. 영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통보를 받은 후 체이스는, 본인이 죽고나면 관을 잠시 납골당에 안장했다가 사정이 나아지면 후손들을 통해 고국인 영국으로 이장시키려 했다고 한다.

 

3. 먼저 사망한 가족들

 

그러나 토머스 본인이 죽기도 전에 다른이가 먼저 사망하게 되었다. 그 사람은 친척인 토마시나 고다드 부인(Thomasina Goddard)으로, 납골당이 만들어진 1807년 7월 31일에 사망하였다. 체이스는 자신의 납골당 안에 그녀를 안치하도록 허락하였다.

 

1808년에는 체이스의 2살된 딸인 앤 마리아(Ann Maria Chase)도 사망해 그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우울증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체이스의 첫째 딸인 도커스(Dorcas Chase)는 아버지 체이스 경에게 "바베이도스 원주민들에게 모질게 대하지 마세요. 아빠가 천벌을 받을까 겁이 나요."라는 말을 남기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1812년 7월 6일 사망한다. 사인은 아사(餓死)였다. 아버지의 가혹한 식민 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단식투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와는 달리 원주민들에게 나름 어질게 대했다고 한다.

 

아버지 체이스 경은 첫째딸인 도커스까지 죽자 그 동안의 악행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결국 토머스 체이스도 식음을 전폐하다가 알수 없는 병에 걸려 1812년 8월 9일 사망한다.

 

여기까지라면 그냥 슬픈 사연의 이야기 정도로 끝나겠지만...

 

그의 사후에 납골당에서는 기묘한 일이 벌어진다.

 

4. 스스로 움직이는 관들

 

 

 

안장 후 상황이 경과됨에 따라 관이 움직인 모습이다.

① 토마시나 고다드 부인의 관
② 토머스 체이스의 딸인 메리 앤 체이스의 관
③ 토머스 체이스의 딸인 도커스 체이스의 관
④ 토머스 체이스의 관
⑤ 사무엘 브루스터 앰스의 관
⑥ 사무엘 브루스터의 관
⑦ 토마스티나 클라크 부인의 관
 


첫째줄 왼쪽 그림: 맨 처음 토마시나 고다드 부인, 토머스 체이스의 딸 도커스 체이스와 메리 앤을 안장한 직후의 모습이다.
첫째줄 오른쪽 그림: 토머스 체이스의 관을 안장하기 전에 묘당을 열었을 때. 왜 인지 고다드 부인과 메리 앤 체이스의 관이 뒤집혀있다.
둘째줄 그림: 토마스티나 클라크 부인의 관까지 안치하고 관들을 제자리에 놓은 모습. 고다드 부인 유골은 따로 수습하고 바닥에 석회를 뿌렸다.
셋째줄 그림: 이후 또 열었을 때 관들이 나뒹굴고 있는 모습. 언제나 납골당을 열 때마다 관들은 엎어져 있었다. 하지만 석회에는 아무 흔적이 없었다.

납골당 안에는 안장 때를 제외하곤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5. 흩어진 관들

 

1812년 8월 9일 영국인 식민지 관리들은 토머스 체이스의 장례를 치르고 관을 납골당에 안장하기 위해 문을 열었는데, 고다드 부인의 관과 체이스의 두 딸인 메리 앤과 도커스 관이 이상하게도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뒤집혀 있는것을 확인했다.

 

관리들은 체이스 집안에게 악감정을 가진 누군가가 뒤집어놨나 생각하고는, 아버지 토머스 체이스 경의 관 위에다 딸 도커스의 관을 겹쳐 올려놓고 다른 관들도 정리해놓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전부터 체이스 경의 폭정이 바베이도스 내에도 소문이 자자했는지라, 관리들도 "원한 살 만한 짓을 밥먹듯이 해왔으니 인과응보인거지 뭐." 하고는 처음엔 넘겼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다음날 이른 새벽에 한 원주민이 납골당 내부에서 빛이 나며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았다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 관리들은 이 소문을 듣고 급히 납골당의 문을 열어보았다. 놀랍게도 전날 토머스 체이스의 관과 겹쳐 놓았던 딸 도커스의 관은 벽에 기대어 90도 직각으로 꼿꼿이 서 있었고 아버지 토머스 체이스의 관은 약 240도 왼쪽으로 기울어져 뒤집혀 있는 기괴한 광경이 발견되었다.

 

이후 1816년엔 토머스 체이스의 가족 외에도 물놀이를 하다 익사한 아기, 세뮤얼 브루스터 앰스(Samuel Brewster Ames)란 친척을 납골당에 매장하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 다시 납골당 입구를 열었을 때는 과거와 같은 현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앰스의 시신을 안장하고 다시 납골당을 봉하고 나간 52일 뒤, 이번에는 병으로 사망한 새뮤얼 브루스터(Samuel Brewster)란 다른 친척을 추가로 안장하기 위해 납골당 문을 다시 열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먼저 들어갔던 관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 후로 토머스 체이스의 가혹한 처우로 진절머리가 난 흑인 노예들이 이에 대한 원한 때문에 납골당 안을 헤집어 놓았다는 소문이 제일 많이 퍼졌다. 

 

 

 

 

6. 신임 총독 스테이 플턴 코튼의 조사

 

 

 

1817년, 섬나라 바베이도스를 다스릴 신임 총독으로 영국으로부터 제1대 컴버미어 자작 스테이플턴 코튼(Stapleton Cotton, 1st Viscount Combermere)이 파견 되었다. 

그는 1819년 7월 7일, 체이스 가문의 또다른 친척인 토마스티나 클라크(Thomasina Clark)라는 부인 사망 했고 이 납골당에 안치될 예정이었다.

이 소식은 코튼 총독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고, 호기심이 생긴 코튼은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였다. 그런데 인부들이 클라크 부인의 관을 안치하기 위해 납골당 문을 열자, 1807년 가장 처음 안치된 고다드 부인의 관이 부서져 있었고, 그녀의 두개골이 입구 쪽을 향해 놓여져 있었다.

 

코튼을 따라 동행한 관리들과 인부들은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했지만, 오히려 코튼 총독은 원주민 노예들이나 누군가가 이 납골당을 의도적으로 헤집어 놓는다고 생각하고는 분노했다. 그래서 범인을 직접 체포하기 위해 계략을 취했다.

 

그는 고다드 부인의 유골을 따로 수습한 후 새 관에 넣어 딴 곳으로 이장하고 모든 관들을 제자리에 위치 시킨 뒤, 납골당 바닥에 석회가루를 잔뜩 뿌리고 입구를 봉한 뒤 영국 정부의 공식 봉인을 부착하였다.

 

이듬해인 1820년 4월 년, 코튼 총독은 납골당 내부 상태를 다시 확인하기로 하였다. 

총독부 관리들과, 토마스 오더슨(Thomas Orderson) 이라는 신부(성공회 사제)를 대동하고 납골당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6개의 관들은 묘당 내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더 괴이한 건 관들이 이리저리 움직였음에도 코튼이 납골당의 입구에 붙인 봉인과 묘당 바닥의 석회가루 모두 그대로 였다는 것이다.

 

7. 또 다른 조사관들의 파견

 

(아서 코난 도일 경의 저서인 "영혼의 법칙"에 실린 삽화)

 

이 기괴한 사건은 바베이도스의 많은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고, 영국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토마스 오더슨 신부를 조사관으로 임명하였고, 추가로 오더슨 신부를 도와줄 여러 명의 조사단을 바베이도스에 파견하였다. 이때 조사단 중에는 몇몇 학자들과 명사들도 끼어 있었는데 그중엔 셜록 홈즈 시리즈로 유명한 문학가이자 심령학자인 아서 코난 도일 경도 포함 되었다.

 

오더슨 신부는 코튼 총독과 비슷한 방법으로 범인을 찾으려 하였다. 우선 납골당의 묘당 바닥에는 모래를 뿌리고 6개의 관들을 쇠사슬로 감아 움직일 수 없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납골당 입구의 사슬에는 밀가루를 뿌려 손을 댄다면 흔적이 남도록 하였다. 추가적으로 납골당 문에 벽돌과 시멘트를 사용해 이중 삼중으로 벽을 쌓아 접근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토마스 오더슨 신부와 코튼 총독과 해당 지역 관리들은 벽돌과 시멘트를 부수고 문을 열어 납골당의 상태를 확인하려 하였다. 그러나 장정 여럿이 달려들어도 납골당의 문은 도무지 잘 열리지 않았다.

공구까지 동원해 간신히 문을 였었을 때, 그들은 문이 열리지 않던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토마스 체이스 경의 관이 세워져 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납골당 내부에는 쇠사슬이 풀린 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며, 시신들 또한 관에서 나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전날 바닥에 뿌린 모래와 쇠사슬에 뿌린 밀가루에는 사람이 접촉한 흔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문제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조사관과 총독, 관리들은 1820년, 그 납골당에 안치되었던 모든 관을 전부 영국 본토로 이장시켰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이후로는 납골당에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지 않았다. 결국 이 미스테리한 사건은 그 원인을 찾지 못한 채 마무리 되었고, 체이스 가문의 관들을 전부 영국으로 이장한 후에는 일이 멈추었지만 사건 자체가 원인을 찾지 못한 영구적 미제 사건이었기에 이 일에 대한 소문은 사건이 멈춘 이후로도 사그러들지 않았다. 지금도 이 납골당은 빈 채로 남아 있는데, 현재는 오컬트 매니아들과 심령학자들이 찾아와 인증샷 사진을 찍는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8. 사건과 연관된 추리

 

(1) 지진 탓?

 

처음에 사람들은 지진 때문이라는 추측을 하였다. 바베이도스는 과거에도 몇번이고 강한 지진에 강타당한 간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추측은 금새 부정되었는데 해당 관들이 두꺼운 납과 철쇠 등의 여러 금속으로 만들어져 굉장히 무거웠으며, 그런 금속제 관이 7개나 되었다는 점이 근거로 작용했다.

 

게다가 관들을 모두 움직이기 위해서는 굉장히 강한 지진이 일어나야만 했는데, 사건 당시 그 주변에서는 어떠한 지진도 관측이 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주민들 중 단 한 명도 지진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가설로는 납골당 아래의 암반에서 지하수가 나오거나 태풍으로 인한 홍수 때문에 관들이 물에 잠긴 채 쓸려 이동한 것이 아닌가 라는 추측도 있었다. 실제로 바베이도스는 태풍이 자주 지나가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추측 역시 조사 결과 납골당 일대에는 지하수가 나올 수 없는 지질 구조를 하고 있었으며, 설사 지하수가 있더라도 납으로 된 관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압이 필요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게다가 이것이 원인이라면 바닥에 뿌려두었던 석회가루나 모래가 멀쩡했던 사실과 충돌한다.

 

(2) 귀신의 소행?

 

셜록 홈즈 시리즈를 지은 대문호이자 심령학에 대해 관심이 매우 깊었던 코난 도일도 토머스 오더슨 신부와 함께 조사단 자격으로 납골당 내부를 조사했다고 전술했다. 그는 초자연적 힘이나 영혼 등에 의해 관들이 움직였다고 주장하였다. 영혼들의 힘이 일종의 작은 가스 폭발과도 같은 신비한 효과를 일으켜 관들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특히 내부가 두터운 납 재질로 된 토머스 체이스의 관을 보고 납은 시신이 부패하는것을 막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영혼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수도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한 코난 도일은 단식투쟁을 했기에 본의 아니게 자살한 격이 된 도커스 체이스로 인해 다른 영혼들이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는 주장도 덧붙였다. 자연사로 죽은 영혼들은 자살로 죽은 영혼들을 싫어하거나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에 그랬다는 것이다.

 

코난 도일의 의견처럼 심령적인 설명을 지지하는 다른 조사원들은 이 현상이 타지에 묻힌 영국인들의 유령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표현을 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일각에서는 아버지의 식민지 정책을 원망하면서 죽었던 첫재딸 도커스 체이스가 자기 관이 아버지 토머스 체이스의 관 위에 올려놓아지자 원망스러워서 그랬다는 얘기도 나오게 되었다. 또한 토머스 체이스의 잔혹한 식민지 정책에 희생된 바베이도스의 흑인 원주민 노예들의 영혼들이 일으킨 복수라고 하는 주장도 했었다.

 

추가로 이 소문을 들은 한 부두교 주술사는 이 사건 자체가 영혼들이 납으로 만들어진 관을 싫어해 다른 관으로 바꿔달라고 표현을 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3) 체이스 가문 원수들의 자작극?

 

체이스 밑에서 고생한 원주민 노예들이나 적대감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납골당 안을 헤집어 놓는 일을 벌인 후 석회가루나 밀가루를 가지고 와서 뿌려서 칩입하지 않은 것처럼 꾸몄다는 설도 있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조사 때에도 밝혀지지 않았고, 설령 그랬다 해도 납골당 안이 크지도 않았고 비밀 통로조차 없었기에 손이 닿은 흔적 등이 남아 있어야 했는데 그런 것 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예 문을 이중 삼중으로 잠그고 시멘트로 봉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관이 움직였으니, 이 의견은 자연스럽게 사장되었다. 설령 문에 바른 시멘트 봉인을 다 부수고 들어갔다 나와서 다시 시멘트로 봉한다 쳐도 이런 삽질을 하기엔 시간도 많이 걸릴 뿐더러 티가 확실히 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의견 중에는 물리적인 방법 외에도 심령적인 방법으로 복수를 했다는 설도 있다. 체이스 밑에서 학대당하던 노예들이나 그 노예들의 동료와 지인들이 부두교 주문을 읊어 관 안의 시신들에 저주를 걸어 이래저래 움직이게 했다는 설이 그것이다. 딱히 좀비까지는 아닐지라도 납골당이나 그 안의 관 속 시신들에 저주를 걸어 고인들이 편히 쉬지 못하게 하는 저주였을 것이라고 한다.

 

2016/09/25 - [공포, 미스테리] - 부산시 북구 고등학생 이용우 군 실종 사망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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